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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나들이

by 청파(서울) 2014. 11. 23.

            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

          경복궁을 갈려다 방향 전환했는데 토파즈님을 만나서 외롭지않게

          아주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덕수궁의 정문인  大 漢 門           

 

              맞은편에 서울시청이라는거이 있는데 뭐하는 곳인지 ? ? ㅋㅋㅋㅋ        

 

    덕수궁 연표

1500년대

1592 (선조25) 4월 임진왜란 발발
1593 (선조26) 10월 의주(용만)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을
시어소(時御所)로 삼고 임시 행궁으로함
1595 (선조28) 궁역의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움
 

1600년대

1606 (선조 39년) 종묘와 궁궐의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함
1608 (선조 41년) 2월 선조 정침(석어당 추정)에서 승하. 다음날 광해군 서청(즉조당 추정)에서 즉위
1611  (광해 3년) 10월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함
1611  (광해 3년) 광해군 다시 경운궁으로 이어함
1611  (광해 3년) 병조판서 이항복이 궁장(宮薔)을 두르고 궁궐의 모양을 갖춤
1615  (광해 7년) 광해군 창덕궁으로 이어함
1617  (광해 9년) 광해군 기울어진 궁장의 수리를 지시함
1618 (광해 10년) 경운궁에 유폐된 인목대비의 호를 폐하고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부름
1623 (인조元) 3월 인조 반정에 성공한 뒤 경운궁 침전(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함, 창덕궁으로 이어
7월 선조의 침전 두 곳(즉조당, 석어당 추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본주인에게 돌려줌
1679 (숙종 5년) 5월 숙종이 호조(戶曹)에 명하여 경운궁(慶運宮)을 개수할 것을 명함
 

1700년대

1773 (영조49) 2월 선조가 환도해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을 맞아 세손(정조) 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행함. 11월 영조가 석어당(昔御堂)
세 글자를 써서 즉조당에 현판을 걸게 하다
 

1800년대

1876 (고종13) 고종이 경운궁 수리를 명하고 즉조당에 전배하며 선조의 기거청정을 회상함
1883 (고종20) 美 공사 ‘푸트’가 정동 민계호의 저택을 구입 美공사관으로 쓰기 시작함
1890 (고종27) 英 공사관 준공함 (정동 4번지)
1894 (고종31) 1월 갑오농민전쟁 봉기
6월 갑오경장 시행
1895 (고종32) 8월 일본 공사 미우라가 주동이되어 '을미사변'자행함
고종이 선조 환도 5주갑(300년)을 맞아 세자(순종)와 즉조당에서 추모사 배례하고
부근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줌
1896 (건양元) 2월 고종 세자(순종)을 데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함
8월 고종이 경운궁을 수리 하도록 지시
8월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을 경운궁으로 옮김
8월 경복궁 집옥재에 봉안되었던 역대 선왕의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옮김
1897 (건양 2) 2월 고종 경운궁 수리 지시함
2월 고종이 인화문(仁化門)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함
4월 경운궁 진전(眞殿) 상량문 제술관 임명함
5월 경복궁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으로 옮겨 지음
1897 (광무元) 6월 선덕전(善德殿-지금의 함녕전)과 보문각(寶文閣)의 상량문 제술관 임명함
8월 고종 경운궁 수리 독촉함
8월 광무(光武) 연호를 반포함
10월 환구단을 남별궁 영빈관 터에 착공함
10월 경운궁 즉조당 현판을 태극전으로 바꿈
10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경운궁 태극전(太極殿)에서 황제가 된 이후
처음 하례를 받음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10월 고종,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존
10월 엄비 아들(영왕) 출산함
11월 명성황후의 장례식 거행. 장례 후 신주를 혼전인 경효전에 봉안
1898 (광무 2) 2월 태극전의 명칭을 다시 중화전(中和殿)으로 바꿈
10월 정동제일교회 완공(정동32-2번지)
1899 (광무 3) 환구단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 황천상제(皇天上帝) 이하 제신위의 위판을 봉안함
 

1900년대

1900 (광무 4) 1월 경운궁 궁장 공사를 완료하고 경계를 확정지음, 전기를 끌어옴
경복궁 흥덕전(興德殿)을 경운궁으로 옮겨오는 등 선덕전, 보문각을 이축 또는 신축함
(선덕전은 함녕전의 옛이름)
4월 경운궁 흥덕전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함
석조전 건립 착공함
10월 경운궁 진전(眞殿)에 화재가 발생하여 숙종 이하 7왕의 어진 소실됨
1901 (광무 5)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 설치된 것으로 추정됨
돈덕전(惇德殿) 지어진 것으로 추정됨
7월 고종 황제의 오순(五旬)을 칭경(稱慶)하는 진연(進宴)이 베풀어짐
10월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중명전, 정동10번지) 화재로 소실됨
1902 (광무 6) 5월 중화전의 명칭을 다시 즉조당으로 하고 즉조당 앞에 새로 지은 중층의 정전을
중화전이라함
5월24에 정동의 미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영사관에서 경운궁 남쪽 담이 붙어 있는
가구(架構) 상가로 통하는 길을 폐쇄(양옥들의 접근을 피하려는 목적)
9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기념비전(紀念碑殿)과 환구단 옆 석고(石鼓) 를 건립
10월 손탁호텔 2층 양관으로 지음
1903 (광무 7) 4월15일 廟 社 壇 宮의 地界를 사방 150m로 정하고 경운궁의 경우는 사방 250m로
하여 접근하지 않도록 통보
1904 (광무 8) 2월 러일전쟁 발발함
2월 한일의정서 체결함
4월 경운궁 대화재 발생, 고종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김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함 (중명전, 고문정치)
11월 황태자(순종)의 첫 번째 비(妃)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석어당에서 승하
1905 (광무 9) 11월 중명전(重明殿)에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체결 (통감정치)
1906 (광무10) 1월 안국동 별궁에서 세자(순종)와 윤택영의 딸 윤씨 가례식과 중명전에 서 외교사절
초청 결혼 축하연이 개최됨
2월 중명전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 초대 통감으로 이등박문 부임
4월 대안문(大安門) 수리 다시 상량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
7월 중화전(中和殿)을 단층으로 중건함
1907 (광무11) 중명전에 서 외교사절 초청 결혼 축하연이 개최됨
4월 남대문 좌우측 성벽을 헐고 도로를 개설
4월 고종 네델란드 헤이그에 ‘특사’ 파견 위해 중명전에서 특사 접견
1907 (융희元) 7월 황제 양위식 중화전에서 거행됨. 궁호를 덕수(德壽)라 함
7월 한일 신협약 체결됨 (차관정치)
8월 군대 해산식을 훈련원에서 가짐
8월 연호를 융희(隆熙)로 결정
8월 순종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
10월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를 결정, 창덕궁 수리를 명령
11월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
1908 (융희 2) 7월 경희궁으로 가는 구름다리 철거(추정)
1910 (융희 3) 덕수궁 석조전 완공
 

1910년대

1910 (융희 4)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소위 ‘한일합방’ 체결(조선왕조 막을 내림)
1910 10월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뀜
1911 환구단과 황궁우 등 주변일대 총독부 소관으로 넘어감
7월 엄비 덕수궁 즉조당에서 승하함
1912 황토현(現광화문사거리 부근)에서 남대문을 잇는 남북축의 도로 개설함
1913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기증형식으로 덕수궁에 심게 함
1914 9월 황궁우만 남긴 채 환구단 자리에 조선총독부 철도호텔 신축함
1915 덕수궁 중명전 ‘경성구락부’(외교클럽)의 사교장으로 쓰이기 시작함
1916 4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함
1917 11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큰 불이 나 내전 일대가 소실됨
1919 1월 고종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1920년대

1921 덕수궁 중화전에 봉안되었던 고종의 어진을 창덕궁 신선원전으로 옮김
1922 궁의서쪽 선원전 터 일부를 통과하는 길을 뚫어
소위 덕수궁 돌담길(현 미국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만들어짐
도로서쪽의 엄비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 북쪽으로 경성제일여고(경기여고) 교사를
지음
1923 덕수궁 돌담길 동쪽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지금의 덕수초등학교)를 지음
1925 3월 덕수궁 중명전 화재로 전소됨
1926 4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종 승하
6월 순종 인산일을 기해 6.10만세운동 전개됨
10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청사 건물 준공됨
11월 덕수궁 선원전 부근 동쪽 언덕에 경성방송국을 지음
 

1930년대

1933 일제에 의해 덕수궁 대부분의 건물 훼철 공개입찰, 방매 처분 당함
10월 1일공원으로 만들어져 일반에 공개함
(국화전시회 최초로 개시; 8 ·15와 6 · 25중 6년을 제외한 70년까지 32회 개최)
1938 3월 31일 석조전별관 준공,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됨
1945년 8월 15일까지 현대미술품 진열
광명문(光明門)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음
 

1940년대

1945 10월 석조전에서 해방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됨
1946 1월 16일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 개최됨
1948 UN한국위원단에서 1950년 6 · 25까지 석조전을 사용함
 

1950년대

1955 6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
6·25 동란중 파괴된 석조전 건물 일부을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복원
 

1960년대

1961 10월 덕수궁 사무소 설치함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1차 도로 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을 철거하고
철책으로 설치, 272평 도로편입 및 지당 491평 반감
(담장공사로 궁내 연못이 491평이 반감되고 수중다리가 철거됨)
1963 1월 18일 덕수궁을 사적 제124호로 지정
1964 4월 15일 야간공개 시작
1968 5월 20일 서울시 도로 확장공사로 시청쪽 도로편입(1,137평)되어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설치(7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 신축공사에 당궁 대지 25평 편입
7월 15일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됨.
1969 5월 3일 덕수궁에서 관리하여 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
(대통령령 제3525호 1969. 7. 24.자)
 

1970년대

1970 8월 21일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 착공.
(1971년 1월 2일 이설준공)
 

1980년대

1987 석조전 서관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화발전연구소가 임대(1994년 1월까지 사용함)
 

1990년대

1992 12월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 개관함
1994 9월외곽담장(포덕문→월곡문 15m) 보수
11월 외곽담장(태평파출소↔영국대사관 30m) 보수
1998 12월 석조전 별관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함
 

2000년대

2005 - 8월15일 궁중유물전시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
- 대한문 수리
2006 1월17일 흥천사종 보물 1460로 지정
2009 - 함녕전 행각 복원
- 중명전 복원

 

 

           한때는 너무도 유명했던 정동극장

 

            토파즈님 ^  오늘 뵌지가 1년도 넘었나봐요 ?

               언제나 건강하시고 늘  행운이 함께 하시길 봐램 합니다 ㅎㅎ

 

       덕수궁 돌담길에서 토파즈님의 미모에 지나가던 아가씨들이

               멍하니 바라보며 질투하고 있어염 ^ㅎ

 

    덕수궁內 작은 연못인데 원앙새가 오고  우렁이가 사는곳 임

 

          ///  시간 있으면 읽어 보셔염 ///

 

     연  혁

창건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에서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덕수궁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전통적인 궁궐제도에 입각한 배치형식이나 자연지세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가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도의 덕수궁 배치도 참고)
당시 덕수궁의 전각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궁궐의 중심부가 밀집된 동남쪽에는
대한문을 비롯 중화전·함녕전·즉조당·석어당·준명당·정관헌 등 당시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있었으며, 궁궐서쪽으로는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일대와
환벽정 등이 있어, 접견실·연회장 등으로 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던
지금의 舊경기여고터, 덕수초등학교 위치로 왕실의 제사가 치러지던 곳이 그것이다.

그밖에 덕수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 구름다리(雲橋)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북쪽의 구름다리는 러시아 공사관 언덕 위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중화전
남쪽 옛 영복당 자리에서 옛 법원자리로 옮겨온 의정부(議政府)와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3년만에 일제는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을 뚫고 도로의 개설, 학교, 방송국 등을 지어
덕수궁을 절단한다. 이로써 덕수궁의 면적은 더욱 축소되고 그 모습을 잃어간다.

아울러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였으며, 훼철된 덕수궁을 1933년 10월 공원(公園)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원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에 잔존하게 된 전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대한문 · 포덕문 · 건극문 · 용강문 · 생양문 · 광명문 · 중화문
○ 중화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함녕전 동행각 일부 · 덕홍전 · 구여당(함 녕전 뒤쪽의 2층집)
   · 정관헌 · 석조전

이 외에 궁성 밖 서쪽 정동 10번지에 광무 8년 4월에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피하였던
수옥헌(嗽玉軒)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조약을 체결한 장소이고 1907년 7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되었고, 순종의 이어소(移御所)로
사용되다가 구미인(歐美人)의 클럽으로, 개인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복원공사를 거쳐 지금은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중명전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 환벽정이 있었다. 순종이 태어난 건물이 있고 명성황후의 혼전이던
경효전(景孝殿)과 순명황후의 혼전(魂殿)인 의효전(懿孝殿)도 있었다. 의효전은 창덕궁으로 옮겼다.

일제강점 이후에 궁의 서쪽 선원전(璿源殿)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를 열었다. 지금의 미국대사
관저와의 사잇길이 이것이다. 도로 서쪽에 떨어져 나가게 된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그 맞은 편, 즉 도로의 동편
제사 준비소 터에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다.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엄비의 혼전 부근에는 그가 소유하던 과수원이 있고 제사의 준비소에는 희생(犧牲)의 도살장
제수용구(祭需用具)를 두는 건물들이 있었고 방송국의 동남방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수학원의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정동 3번지로 지금의 성공회 교회당이 있는 일대가 그 터전이다.

그러나 광무 11년의 고종 폐위(廢位) 및 융희 4년(1910) 한일합병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 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건립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 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먼저 수호조약을 체결하자 구미제국들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가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그리하여 서울의 정동을 비롯한 주요한 곳에 서구공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앞다투어 양옥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은 덕수궁 후문 쪽에 자리잡고 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후 1884년 최초의
주한공사 루시우스 H 푸트장군이 부임해오자 당시 정5품 한림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미화2천달러(한화1만냥)에 구입하여 공사관 겸 저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현 정동교회 건너편(정동 15-1번지, 1977년 사적253호 지정)에 1890년(고종27)
건축되어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986년2월1일부터 다음해 2월20일까지) 머물렀다.

영국공사관은 덕수궁 북쪽 현재의 위치(정동 4번지)에 1890년 세워졌다.
프랑스공사관은 1886년6월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그 이듬해 박동 독일공관 서편에 인접한
한옥을 사용하였으나(수표교 북방도로 현 관수동 126번지) 협소한 것을 이유로 1888년 11월
러시아공관과 정동교회가 인접한 지역(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로 공관기지를 선정 구매하여 1889년 10월
이사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공사를 철수하였다.
1901년(광무5)에는 각 외국 공관에 정동 황궁(皇宮) 근처에 고층건물을 짓지 말도록 통보하기도 하였다.

구미열강의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구미인들이 세운 양옥건물들도 줄을 이어 세워졌다.
덕수궁 서남쪽에 있는 정동교회(정동32-2번지)는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하여 감리교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1885년 7월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처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어 1895년
한옥을 개조하여 새 교회당건물을 세웠다. 1890년 조선에 전파되어 온 성공회성당(정동 3번지)은 1914년
서울 도시계획에 의해 현재의 태평로 일대가 확장되면서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어
1926년 5월 완공되었다.

외국인 상대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1900년 정동(정동 32번지)에 세워졌다. 이 호텔은 1885년에
초대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베르(Waber)와 함께 내한(來韓)한 손탁양이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에
있는 한 가옥을 하사 받아 외인(外人)의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1902년 10월에 이 구식가옥을 헐어서
2층 양관을 신축하였다. 2층은 귀빈실, 하층은 보통실과 식당을 두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물은
1918년에 이화학교에서 매수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그것을 헐고 1923년 프라이 홀을 지었다.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일제강점이후에는 궁의 서쪽 선원전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가 열였다. 지금의 미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그것이다. 선원전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고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
1923년에는 그 맞은편 제사 준비소 터에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고,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중학과(中學科)와 대학과(大學科)의 창설로 학교체제가 완비되어갈 무렵 학생수가
증가하여 기왕에 있던 메인홀(Main Hall)만으로는 학생을 완전히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하여 정동 30번지를 구입하였는데, 이 터는
1896년에 설치되었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폐쇄된 원호국 시종원(侍從院)이 있던 곳이다.
프라이는 미쓰 홀부룩(Miss 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 착공하여 1915년 3월 준공하였다.
원래 홀부룩의 기금은 그의 동생인 사라 심프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심프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이라 하였다.
또한 학당장 월터는 독자적인 유치원 건물의 필요성을 느껴
미국의 에드가 후퍼부인(Mrs. Edgar Hooper)으로부터 기부금 1만원을 받아 이명원(李命遠)으로
하여금 유치원 건물을 짓게 하였다.

1921년 5월 우선 60평의 교사를 건립하고 동년 10월에 40평의 교사를 동년에 증축하여 총 건평
100평의 유치원 전용건물(에드가 후퍼기념관 : Ralph Edgar Hooper Me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이
완성되었다 한다.
프라이홀(Frey Hall)은 정동 29번지에 184평의 손탁호텔을 구입하여 이 자리에
새 건물을 건축한 것으로, 1922년 8월 제5대 학당장 월터가 착공하여 1923년 9월 제6대 학당장
아펜젤러 때 완공되어 프라이홀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1935년 전문학교가 신촌으로 옮긴 뒤
이화여고에서 사용하다가 1975년 화재로 2 · 3층 474평이 소실하였다.

조선말에 호조 대신 조세, 국채, 화폐 등 재무 행정을 관장한 관아인 탁지부는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세종로에서 덕수궁 옆 중구 정동으로 이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호조를 폐지하고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설치했는데 1895년에 탁지부로 개칭한 것이다. 탁지부가 이전되어 사용한 건물은
고종이 양위(讓位)하기 전에 의정부 청사로 설계한 것으로 1907년 12월에 준공되었지만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였으므로 탁지부 청사로 변경했다. 이 건물은 일제 침략기에 고등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0년에 헐렸다.
현재 서울특별시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서울고등법원 청사는 중구 서소문동 37번지에 위치해 있다. 본래 재판소는 대한제국시대부터 공평동에 있었으나 1927년 6월 정동 언덕의 원래 총독부 분실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로서 새 청사의 신축을 시작하여 1928년 8월에 준공되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광복을 맞으면서, 덕수궁 내의 석조전이 새로운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해 10월 해방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이듬해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임시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 6.25가 발발할 때까지 UN한국위원단에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1955년에는 석조전 건물의 일부를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1961년 10월 정식관리기구인 덕수궁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 1차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이 철거되고 철책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7월 덕수궁을 사적 제 124호로 지정하였다. 다시 1968년 5월에는 서울시 도로확장공사로
시청쪽 도로에 편입되어 설치된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가 덕수궁 동북담모서리에 신축되었으며, 이 공사로
덕수궁 대지 25평이 편입되었다. 7월 15일에는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 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덕수궁에서
관리하여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대통령령 제3525호) 1970년 8월에는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이설 준공되었다. 1973년부터
86년까지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98년 8월 석조전 서관이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하였다.

1992년 12월 덕수궁 관리사무소의 직제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덕수궁관리는 물론 5대궁궐 13개능원에 분산 소장되어있던 궁중유물을 한군데 집중 관리하게 되었으며,
석조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전시관도 개관하게 되었다.

2005년 8월15일 궁중유물전시관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덕수궁의 관리는 다시 덕수궁관리소에서 하고 있다.

 

   // 다 읽으신 님들은 복 받을껴염 ^福^ //

 

 

 

 

출처 : 청파야생화세계
글쓴이 : 청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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